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9.13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조사 === 9월 15일에서 16일에 걸쳐 중국대사 허문익과 3명의 보좌관이 몽골 정부의 허락을 받고 배석한 가운데 운두르한에서 현장검증이 이루어졌다. 허문익은 사고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부분의 시신이 엎어진 채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머리가 시커멓게 불에 타 신원 확인이 힘들었다. 우리는 아홉구의 시신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눕혀놓고 차례대로 번호를 매긴 다음 향후 식별을 위해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후속 조사 결과 린뱌오는 사체 제5호로 판명되었다. 머리에 약간 벗겨진 부분이 남아 있고, 얼굴에 찰과상이 있으며, 뼈가 부러져 튀어나오고, 눈썹은 모두 불에 타고 눈은 검은 구멍만 남은 상태였다. 시체 제8호는 린뱌오의 부인인 예췬이다. (...) 그녀는 비교적 덜 탄 상태로 머리카락이 온전히 남아 있었으나 왼쪽 부분에 치명상을 입었다. 사체 제2호는 린뱌오의 아들 린리궈다. 시체가 비교적 크고 얼굴은 화염 속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한 듯 새카맣게 타고 일그러졌다. 사망자의 유품 중에 린리궈의 이름과 002번이 적힌 공군학교 수첩이 발견되었다.|| 사체의 정확한 판명을 위해 소련 대표부는 몽골과 협의 끝에 린뱌오와 예췬의 머리를 잘라 [[모스크바]]에 보내 법의학 검시를 받게 했고 나머지 시신은 사건 현장에 매장했다. 소련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린뱌오가 요양했던 의료기룍을 통해 린뱌오의 두부와 치형 진료 기록 카드와 모스크바로 보내진 머리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2년 1월 17일 소련은 정치국 회의를 통해 대중 관계의 실마리를 끊지 않기 위해 린뱌오의 추락사 소식을 보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편 몽골 측은 그저 민항기가 실수로 들어갔다고 발뺌할 뿐인 중국측의 태도에 화가 나서 1971년 9월 29일 오후 5시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 공군기가 영공을 침범했다고 발표했다. 9월 18일 중국공산당은 린뱌오의 죽음을 은폐하고 성, 시, 자치구의 당 위원회 상무위원 이상 간부들에게 <린뱌오가 조국을 배반하고 도망친 데 대한 통지>를 극비로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1년 9월 13일, 당황한 나머지 적진으로 도망쳐 당과 조국을 배반하고 스스로 멸망을 택했다. (...) 린뱌오라는 이 자본계급의 야심가, 음모가의 모든 게 밝혀져 파탄되어 버렸다.|| 중국공산당은 린뱌오가 1970년 당 제9기 중앙위원회 2중전회에서 [[천보다]]와 짜고 주석 자리를 노리려다가 폭로되어 달아난 것으로 규정했고 체포 중이던 천보다를 반역 혐의로 수감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 중국 대사관은 항공기가 착륙을 시도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폭발하지도 않았다는 1차 결론을 내리고 이를 보고했으나 저우언라이는 불충분한 설명이라고 여겨 더 자세히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9월 21일, 중국 대사관 이등 서기관 쑨이셴이 베이징으로 급파되어 밤 11시에 저우언라이를 접견했다. 쑨이셴은 3시간 동안 저우언라이에게 보고를 올렸으나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납득되지 않아 공안부장 리전과 베이징 공군사령관 리지타이에게 사고에 대해 기술적으로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연료 부족을 원인으로 지목하였으나 정작 보고에서는 이들이 추락하기 전에 30분 정도 더 비행할 수 있는 연료가 있었고 랜딩기어와 보조날개를 가동하지 않고 착륙을 시도했다는 기이한 점을 포착했다. 어쨌거나 공식적인 원인은 연료 부족으로 규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